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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맛집이요? 청류라는 곳입니다. 불고기도 맛있고, 어복쟁반도 맛있고. 평양냉면집 굉장히 유명한데, 청류에 꼭 가서 맛보셨으면 좋겠어요. 매력이 달라요. 밥 말아 드세요.”

흑백요리사에 출연해 4강에 오르며 유명해진 윤남노 세프(요리하는 돌아이)가 인스타그램에서 이렇게 극찬한 평양 냉면집 ‘청류’는 서울 은평 한옥마을과 송파 문정동에 식당 두 개를 운영하고 있다.
윤 세프의 극찬이 아니더라도 청류는 이미 평양냉면 마니아들 속에서 소문이 난 식당이다. 점심마다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이미 식당의 인기를 말해주고 국민은행 자동차할부 있다.
기자가 직접 방문해 먹어보니 육수 맛이 일품이었고, 면은 재료비를 아끼지 않고 좋은 메밀을 넉넉히 썼다. 소고기 전골, 샐러드, 물김치 등 다른 요리들 역시 맛도 훌륭했지만, 마주했을 때의 비주얼이 화려하면서도 깔끔했다. 보는 순간 “아, 맛있겠구나” 싶어 침이 꿀꺽 넘어가는 그런 식당이었다.
점점 입소문을 타고 실매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정작 청류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여사장이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외손녀 출신의 탈북 여성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해 42세의 김유경 사장은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끝에 지금은 1년에 세금만 1억 넘게 내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성공은 그냥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와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 서 20년째인데, 아직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주도도 식당을 하기 전에 한 번 놀러 갔다 왔습니다. 애를 낳기 전날까지 식당에서 일했고, 출산 일주일 뒤부터 또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이 말엔 가냘픈 몸으로 버텨온 삶의 여정이 모두 녹아있다.




판결

서울 은평 한옥마을 및 진관사 인근에 위치한 ‘청류’ 전경과 식당에서 팔고 있는 음식 일부.


● 풍족했던 유년 시절
김 씨는 북과 남에서의 ‘팔자’가 너무나 극명하게 바뀐 사람이다. 한국에 와서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농협학자금대출조회 열심히 살고 있지만, 북에선 남는 게 시간뿐인 ‘놀새’였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도 하도 심심해서 중국 ‘관광’을 왔다가 어쩌다 보니 오게 됐다.
그가 1983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정부 기관 소속의 운전사(운전기사)였다. 유통시장이 빈약한 북한에선 운전사는 잘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아버지는 그냥 운전사가 아니라, 수십 톤급 대형 트럭을 몰았고, 북한에서 구하기 힘든 물자들을 날랐다.
덕분에 김 씨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컬러TV와 냉장고 등을 갖추었다. 고난의 행군 기간엔 중국과 무역을 하는 업자들이 줄을 지어 찾아와 물량을 실어달라고 했다. 중국과 평양을 한 번씩 오가면 기름이나 설탕, 대게 등 각종 비싼 것들이 집에 드럼통이나 마대로 들어왔다.
학창 시절도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들을 잘 주니 선생들이 모두 그를 예뻐했다. 부친은 겨울에 땔감을 하라고 학교에 석탄을 자주 싣고 왔고, 지방에 가야 하는 농촌동원 때엔 반 아이들이 배고프지 말라고 식량도 많이 구해 주었다.
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잡은 것 때문에 어깨를 쫙 펴고 살긴 했지만, 사실 부친의 출신 성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김 씨의 할아버지는 강원도 춘천 태생인데, 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돌아갔다. 북에서 남조선 출신은 아주 나쁜 출신성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간부가 될 출신성분도 아니었다. 상황을 빨리 판단한 부친은 기술직을 선택했다.
외가는 확실히 출신성분이 나빴다. 김 씨의 외할아버지는 국군포로 출신으로 전쟁이 끝난 뒤 함북 회령에 있는 학포탄광에 끌려왔다. 부산 출신인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발발한 뒤 15세에 학도병 출신으로 참전했다. 이후 국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며칠 전에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그래서 정전협정 때 교환된 포로 문서에도 외할아버지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결혼해 김 씨의 모친을 포함해 자식을 다섯 명 낳았다. 늘 고향인 부산에 가고 싶다고 하소연해서 그때마다 자식들이 “아내와 자식이 다 여기 있는데, 15년밖에 살지 않은 부산엔 왜 가고 싶어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고향에 오고 싶어 하던 외할아버지는 코로나 시기 눈을 감았다.
김 씨는 한국에 와서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전사자 명비에 외할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름이 특이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김 씨가 입국해서야 한국 정부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국군포로 외손녀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전혀 없었다. 부산에 살았던 외할아버지의 형님이 지금까지 대신 전사자의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김 씨는 식당에서 쓰는 많은 식재료들을 북한과 가까운 민간인통제선(DMZ) 안에서 직접 재배해 사용하고 있다.


● 중국에 대한 동경
김 씨는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 시내에 나가면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고, 배가 고파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도 늘었지만, 오히려 이때 김 씨의 집은 더 잘 살았다.
식량이 귀해지니 무역이 활발해졌고, 대형트럭에 대한 수요도 많아진 것이다. 짐을 나르고 받은 대가 중 상당액을 간부들에게 상납하고도 아버지에게 떨어지는 몫은 많았다.
김 씨는 15세인 1998년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에 있는 2년제 회계경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솔직히 꿈과 희망도 모를 어린 나이에 부모가 가라고 하니 간 학교였다.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2000년에 졸업을 하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청진에 있는 공장·기업소들은 거의 다 멈춰 서 있다 보니 17세 어린 여자애를 받겠다는 곳도 없었다.
집도 잘 사는데, 굳이 일을 다닐 이유도 없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그의 하루였다. 끼리끼리 놀다 보니 친구들도 부자였다. 여름이면 바다에 나고, 추워지면 당구장에 가고, 영화관에 갔다. “오늘은 어딜 놀러 갈까”가 유일한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지방 도시에 돈을 뿌리며 놀만한 곳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중국에 가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 중에 항일투사 집안의 손녀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청진에서 판사를 지내다가 평양에 올라갔다. 이 친구는 평양상업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종종 청진의 친구들에게 놀려왔다.
어느 날 2~3년 보이지 않던 친구가 염색한 매직 머리를 하고 나타났을 때 김 씨는 깜짝 놀랐다. 여러모로 보아 사람이 훨씬 세련되게 달라진 것이다.
“나 2년 동안 중국 옥류관에 종업원으로 나갔다가 왔어. 월급은 100달러씩 받았는데, 나라가 어려우니 50달러는 바쳤어.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지. 중국은 전혀 다른 세계였어.”
친구가 보여주는 중국 생활을 담은 사진을 보며 김 씨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사진만 봐도 정말 청진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나도 꼭 중국에 갈 거야.” 하지만 출신성분이 나쁜 그가 해외식당 종업원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탈북할 결심까진 서지 않았다. 청진역 앞을 지나다닐 일이 많았는데,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된 뒤 수갑을 차고 호송되는 탈북민들을 많이 보았다. 짐승처럼 취급받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잡히면 죽는 게 낫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때까진 탈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2010년 서울 강남에서 회사 생활을 하던 때의 김 씨. 이때엔 책방에 자주 찾아가 책을 읽었다.


● “남조선에 갈게요”
그를 두만강을 건너게 만든 일은 우연히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두만강 옆에서 살다 보니 가끔 놀러 갈 때가 있었다. 21세 때인 2004년 가을에 외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가까운 친척이 중국과 밀수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친척은 중국에도 친척이 많았는데, 강 건너 마주 보이는 중국집도 친척 집이었다.
친척은 동네에 사는 경비대도 다 끼고, 두만강을 안전하게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중국에 놀러 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친척이 중국에 갈 때 졸랐다.
“나 중국에서 한 달만 놀다 오고 싶어. 나도 좀 데려가 줘.”
“그래? 그럼 이번에 데려갈 거니 실컷 구경하고 와.”
이미 경비대를 다 알고 있는 터라, 두만강을 건널 때 크게 긴장하진 않았다. 강을 건너 친척 집에 들어가니 창고에 사과가 한가득 쌓여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이틀 있었는데, 한 번도 정전이 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이틀 뒤에 연길에 사는 친척이 그를 데리러 왔다. 연길은 역시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진 도시였다. 친척들이 그를 데리고 다니며 관광을 시켜주었다. 북한에 가기 싫어졌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말도 없이 온 중국이라 돌아가긴 해야 했다.
물론 돌아갈 때도 친척 집을 통해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 겁나는 것은 없었다. 중국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일주일쯤 지나 친척이 갑자기 이런 제안을 했다.
“너 남조선에 가보고 싶진 않니? 거기 가면 정착금으로 2000만 원을 준대….”
중국 돈으로 환산한 액수를 듣고 김 씨도 놀랐다.
“그 많은 돈을 공짜로 준다고? 그럼 내가 남조선에 가서 그 돈을 받고 다시 돌아와도 돼?”
“그럼, 얼마든지 가능하지.”
김 씨는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북한에선 소속된 직장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으니 1년 정도 사라졌다가 나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식당 종업원을 했던 친구는 1년에 고작 600달러를 받았다고 했는데, 자신은 남조선에 가서 정착금과 일을 해서 번 돈을 합치면 1년 만에 수만 달러를 벌어 고향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집이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수만 달러는 북한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돈이었다.
게다가 그는 북한에서 몰래 돌아가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이미 다 보았다. 드라마 속 남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더 번화하고 재미있는 곳일 것 같았다.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고, 덤으로 부자도 될 수 있으니 한국에 가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저 남조선에 갈게요.”



2019년 대구의 한 카페에서 찍은 사진. 한국에 와서 14년 만에 처음 가본 대구였다.


● 대타로 당첨된 한국행
중국에 건너온 지 열흘 만에 김 씨는 그보다 나이가 어린 탈북 여성과 짝을 이뤄 한국행 길에 올랐다. 그가 이런 기회를 잡은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 있는 한 북한인권단체가 연길에서 탈북민 일가족을 데려오기로 하고 모금까지 다 했는데, 이 일가족은 불행하게도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탈북민을 데려온다고 모금까지 마친 단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탈북자라도 데리고 와야 했다.
그래서 연길에서 당장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탈북민을 수소문했는데, 여기에 김 씨가 대타로 ‘당첨’된 것이다. 이동 준비도 다 끝난 터라 김 씨는 곧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의 안내원은 조선족 할머니였는데, 손녀 두 명을 데리고 여행하는 기분으로 도시를 이동했다. 침대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여긴 뭐가 유명하다며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었다. 셋은 그렇게 공짜 관광을 즐기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쿤밍까지 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을 빼곤, 다 좋았다. 북한에서 살 때 그는 함경북도 밖은 가본 일이 없었다. 자그마한 지역에 갇혀 살다가 그 넓은 중국 대륙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으니 21세 처녀는 정말 신이 났다.
한 번 이동할 때마다 날씨가 더워져 옷을 한 벌씩 벗는 것도 신기했다. 반소매 셔츠를 입고 지금쯤 북에서 외투를 꺼내 입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하니 자신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지역에 가서 택시를 타고 밤새 달리니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라오스라고 했다. 여기서 할머니는 둘을 다른 인솔자에게 넘겨주고 돌아갔다. 새로 등장한 브로커도 두 명의 탈북민을 데리고 있었는데, 다섯 명이 밤새 산을 넘어갔더니 이제 중국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라오스의 한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관에서 묵다가, 며칠 뒤 작은 배를 타고 메콩강을 건넜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인솔자가 나타났다. 이번엔 한국 남자였다. 김 씨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한국 남자를 처음 보게 됐는데, 선한 얼굴에 매너도 좋았다.
한국 남자는 그들을 데리고 방콕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인계해 주었다. 한국대사관은 그들을 다시 현지 한인교회에 데리고 갔는데, 교회에선 탈북민을 위한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성들만 있는 숙소에 가니 이미 먼저 온 3명의 탈북민 아줌마들이 있었다.
이때부터 방콕 생활이 시작됐는데, 여권이 빨리 나오지 않아 무려 6개월이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름 나쁘진 않았다. 숙소가 한 층을 통째로 쓰다 보니 다섯 명은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매달 생활비가 나왔는데, 이 돈으로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었다. 명절이면 교회 한국인 집사들이 집에 데려가 맛있는 음식도 먹게 하고, 며칠씩 재워주기도 했다.
방콕은 중국과 또 달랐고, 신기한 것도 많았다. 특히 구경도 하지 못한 각종 과일이 많아 행복했다. 김 씨는 방콕에서 파란 바나나를 처음 봤다. 북한 장마당에서도 바나나가 팔렸다. 바나나를 살 수 있는 집은 엄청 부자였다. 쌀이 1㎏ 20원 할 때 중국에서 나온 바나나는 1개에 50원에 팔렸다. 그런데 시장에 나온 바나나는 하나같이 시꺼먼 색이었다. 그래서 김 씨는 바나나는 원래 시꺼먼 과일인 줄 알았다.
북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세상 물정 몰랐던 김 씨는 종종 함께 있는 탈북민들에게서 “너 간첩이 아니냐”는 오해도 샀다. 가령 북한 집에서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워먹었던 이야기를 하니 “북한에 전자레인지 있는 집이 어디 있냐. 너는 정말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식이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2005년 5월쯤 되니 갑자기 방콕에 오는 탈북민이 많아졌다. 7월에 방이 비좁다고 느낄 때쯤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까지 행운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온 직후에 탈북민끼리 싸움이 벌어져 처소가 없어졌고, 이후에 온 탈북민은 모두 방콕 감옥에 몇 달 수감돼 있으면서 한국행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김 씨의 첫 월급 명세서. 그는 아직도 이것을 간직하고 힘들 때마다 꺼내 본다.


● “3년만 버텨보자!”
방콕에서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김 씨는 처음으로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이 비행기에 오르면 집에 다시 가지 못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한국에 도착해 조사를 받고,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때가 2005년 11월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빨리 돈을 받고 중국에 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정착금 2000만 원을 일시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3년에 나눠 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직장에 취직해 일하면 매년 500만~600만 정도 나온다는 것이다.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왕 왔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3년 동안 정착금을 꼬박 모으고, 그리고 3년 열심히 벌어 내가 생각한 돈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중국에 갈 거야. 3년만 버티자.”
집은 양천구에 있는 17평 임대아파트를 받았다.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겨울엔 뜨뜻하고, 정전도 안 되는 아파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집에만 박혀 있을 순 없는 일. 빨리 취직해야 했다. 복지관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정착 한 달도 안 돼 그는 군포에 있는 시트지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한 시간 반 걸렸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에 억척스럽게 다녔다. 토요일까지 주 6일, 8시간 이상 일했는데,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지금도 김 씨는 첫 월급 명세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힘들 때마다 첫 월급 명세서를 꺼내봅니다. 그때를 돌아보며, 내가 이때도 견뎠는데, 지금은 훨씬 나아진 것 아니냐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그땐 정말 친구도 없어 너무 외로웠고, 말투도 이상하다고 놀림도 받았습니다. 지하철 타는 법도, 버스 타는 법도 몰라 집을 못 찾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3년 돈 벌고 집에 간다고 세탁기도 사지 않고 손빨래를 하면서 버텼는데, 돌아보면 그때가 제일 힘든 시절이었죠.”
몇 달쯤 지났는데, 그가 북에서 회계경리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고 누가 변리사 사무실에 소개해 주었다. 변리사 사무실은 강남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경리 보조로 일하게 됐다. 월급도 세후 115만으로, 이전보단 훨씬 많아졌다. 양천과 군포만 오갔던 그는 강남에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드라마에서 보던 남조선이 여기에 있었네.”
강남에 가보니 너무 황홀했다. 하지만 그에겐 돈을 벌어 3년 뒤 집에 간다는 목표가 있었다. 한 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고, 교통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몇 만원만 썼을 뿐이었다. 화려한 강남은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강남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청계천에서 찍은 사진.


● 3년 만에 장만한 아파트
3년만 버텨보겠다던 강남에서 그는 2014년까지 9년이나 회사 생활을 했다. 집으로 가겠다는 결심이 흔들린 것은 한국 생활이 2년차에 접어들었던 2007년경부터였다.
이때 그는 업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2년제 전문학교 야간반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드디어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함께 휴일에 서울 시내 곳곳을 놀러 다니기 시작하니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는 놀새였다. 각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에 가면 가족과 살 순 있겠지만, 이제 내가 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서울을 경험한 뒤 북한에서 살 미래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나름 새로운 논리가 만들어져 머릿속을 흔들었다.
“내가 여기서 잘 살면 부모님도 기뻐할 거야. 북에 와서 사는 것을 원치 않을 거야.”
어쩌다 보니, 남자 친구도 생겼다. 북에 돌아가 북한 남자랑 결혼해 사는 상상은 하기도 싫어졌다. 북에 가겠다는 결심은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여기에 남아야겠다고 생각하니 임대아파트에서 나와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첫 번째 목표가 됐다. 그는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2008년에 은평뉴타운에 30평짜리 아파트를 2억9000만 원에 분양받았다. 대출도 받긴 했지만, 김 씨처럼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자기 아파트를 장만하는 탈북민은 드물다.
세월이 흘러 2014년이 됐다. 이제는 업무 전문성도 높아지고, 월급도 세후 250만 원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미래를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변리사들이 얼마를 받아 가는 지를 잘 아는데, 자신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월 500만 원은 벌고 싶었다. 하지만 전문직 자격증을 따기엔 역부족이니 선택지는 자영업밖에 없었다.
첫 창업은 김밥집이었다.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서초 선릉역 인근에 계약금 5000만 원에 월세 250만 원짜리 가게를 열었다. 김밥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가게를 내기 전에 다른 김밥집에 몇 달 동안 알바로 취직해 일했다.
2014년 4월 13일 작은 테이블 3개가 겨우 들어가는 9평짜리 작은 가게이지만, 마침내 자신의 식당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날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3일 뒤 주방에서 티브이로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날 받은 충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2012년 우연히 가게 된 국제자동차 경주장에서 한 때를 보내는 김 씨.


● 나의 브랜드를 찾다
김밥집은 생각보다 잘 됐다. 고되긴 했지만, “돈을 버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아침 6시에 가게에 나가 재료를 준비하고, 9시에 문을 열어, 저녁 9시까지 일하는 일과가 반복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1년 동안 열심히 벌어 모은 돈으로 2015년에 서울 남부터미널 인근에 김밥집 2호점을 냈다. 자영업을 시작하고 한국에 와서 처음 사귄 뒤, 8년째 연애를 해왔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고, 2015년에 딸이 태어났다. 그는 출산 전날까지 그는 김밥을 만들었고, 출산 일주일 뒤 다시 식당에 나와 김밥을 말았다.
김밥집으로 번 돈으로 2015년 여의도 KBS 앞에 이번엔 감자탕집을 열었다. 좀 번듯한 식당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자탕은 장사가 잘되지 않아 얼마 뒤 접었다. 하지만 큰 식당을 운영하면서 배우는 점도 많았다.
그때부터 그는 매년 식당 하나씩 만드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김밥 가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다음 식당은 고깃집이었다. 고깃집은 더 힘들었지만, 잘 됐다. 김밥집을 처분하고, 고깃집에 매달렸다.
2019년 그는 위례신도시에 갈빗집을 냈다. 상호는 ‘류경식당’으로 정했다. 드디어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진 것이다. 류경식당은 직원이 직접 갈비를 구워주는 식당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됐다. 특히 코로나 때 거의 대박이라고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몰려왔다.
돈이 생기니 내 가게를 가지는 것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 위례 식당은 매달 1400만 원씩 월세를 냈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만 매출이 떨어져도 마음이 불안해졌다. 게다가 장사가 잘되면 건물주가 언제 나가라고 요구하고, 식당을 차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당을 차릴 땅을 찾느라 많이 다녔다. 그리고 결국 찾은 땅이 은평뉴타운 한옥마을 인근이었다. 집을 은평에 분양받다 보니 아무래도 살고 있는 지역이 더 잘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땅값이 만만찮게 비쌌다. 건물을 올리려고 하니 건축비도 혼자서 부담하기엔 쉽지 않았다.
목표가 생기니 길도 나타났다. 과거 냉면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서관면옥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대표가 일 잘하는 그를 눈여겨보았다. 이후 둘은 동업자로서 친해졌는데, 은평에 세우는 건물에 똑같은 지분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반반씩 투자해 5층 건물을 짓고, 이 건물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서관면옥 분점으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건물이 올라갔고, 2022년 10월 마침내 은평에서 식당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언제까지 다른 브랜드로 영업할 순 없었다.
그는 ‘류경’이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2024년부터 독립했다. 그해 9월 문정동에 청류라는 브랜드를 단 식당을 냈고, 올해 1월 은평의 식당 이름도 ‘청류’로 바꾸었다.



김치를 만들고 있는 김 씨. 그가 직접 만든 김치는 청류 식당의 또 다른 별미다.


● 세금 1억 내는 탈북민
열심히 일한 덕에 이제는 주변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도 듣고, 세금도 많이 내게 됐다. 지난 1년 동안 그가 국가에 납부한 세금만 1억 원이 넘는다.
식당도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좀 편히 살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특별히 계획을 세워놓고 사는 인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발을 펴고 살 생각도 아직은 없다. 당면한 목표는 청류를 미슐렝에 등재하는 것이다.
그는 청류에서 사용하는 쌀 등 식재료를 일부러 민간인통제선(DMZ) 안에서 재배한 것들로 골라 사용한다. 요리 한 그릇 안에 자연과 사람, 그리고 철학을 담아내겠다는 뜻이다.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젊은 세프들이 모여서 청류만의 평양냉면을 함께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억척스럽게 살아온 삶인지라, 정착이 어렵다고 주저앉아 하소연하는 탈북민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국군포로의 외손녀지만, 국가에서 뭘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아무 혜택도 받은 것은 없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땅에 맡겨놓은 게 하나도 없는데, 자꾸 국가만 쳐다보며 손을 내밀면 안 됩니다. 북한에선 아무리 일해도 돈을 주지 않는 동네인데, 북에선 열심히 살다가 엉뚱한 곳에 와서 보상을 기대하면 안 되죠. 어떤 일이든, 돈 버는 일은 다 힘듭니다. 탈북민들은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길까 봐 겁내지 말고, 임대아파트에서 하루빨리 독립하고, 나라에 세금 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국에 와서 20년을 살면서 아직 여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바쁘게 살다 보니 외국에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제주도는 두 번 가봤는데, 한 번은 일 때문에 간 것이라, 여행으로 간 적은 한 번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엔 여행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평양입니다. 저는 북에서 살면서 함경북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보니, 어렸을 때 평양에 그렇게도 가고 싶었습니다. 여기 식당 앞이 통일로인데, 40㎞ 정도만 차를 타고 가면 북한 땅이거든요. 나중에 통일이 되면 이 길을 따라 평양에 갈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땐 북한에 사는 옛 친구들을 다 부른 뒤, 평양에서 놀새 모드로 변신해서 다시 진하게 놀아야죠. 하하하~.”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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